2010년 7월 14일 수요일

1박 2일 동안의 남도 여행 2 (다산초당, 대흥사, 녹우당)

첫날은 수원 -> 곡성 기차마을 -> 구례 화엄사 -> 보성 대한다원 -> 보성 다향모텔로 하루 일정을 마치고,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둘째날은 일단 강진 다산초당부터 구경하기로 하고, 보성에서 바로 강진으로 출발했다.

▶강진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으로 가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다산유물전시관이었다. 이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 정약용의 일생과 업적 그리고 유물을 일반인에게 알기 쉽게 소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의 사상과 저자물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해줘서 다산초당을 가기 전에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기로서 봉건적인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 있던 시기였는데 이런 시기에 그의 개혁적인 사상이 싹텄다고 한다. 다산의 개혁 사항을 담은 대표적인 책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그리고 《흠흠신서》가 이곳에서 쓰여졌다.


그리고 수원 화성을 건설할 당시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를 사용했다는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 수원 화성 건설 현장에서 거중기를 사용하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화성성역의궤》에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 있다고 한다. 정약용이 과학 기술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기록으로 잘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강진 유배 생활 중 초막을 짓고 11년 간 거처했던 다산초당의 동암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하였다고 소개되어 있다. 500권이면 정말 엄청난 저술을 하였군.


다산 정약용의 생애도 시대별로 조형물로 전시되어 있다. 그는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고위직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중간에 암행어사도 했단다. 《목민심서》를 쓸 때 이런 경험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를 총애하던 정조가 죽은 후 "신유사옥"으로 유배를 갔단다. 유배 기간 중 독서와 저술에 힘써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고, 유배에서 풀려나 경기도 남양주시 조양면 능내리에 위치한 고향집 여유당에 돌아가 살았단다. 안경을 낀 다산 정약용의 영정이 걸려 있어서 사진을 찍어 봤다. 그의 학자적인 풍모가 느껴지는 영정 사진이다. 와~


다산유물전시관을 나와 다산초당을 가기 위해 안내판에 쓰여 있는 지도를 보니 5~10분 정도로 가까워 보였다. 얼마나 걸리는지는 안내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가보니 예상이 잘못되었다. 다산초당이 그렇게 멀었다면 다산수련원이나 말씀의 숲도 먼저 구경하고 갔을텐데...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안내 표지판이 있어 따라가 봤다.


가는 길에 멋진 가로수길이 펼쳐졌다.


언덕을 넘으니 초가집 몇 채가 나왔고 이 마을이 귤동마을이란다. 여기에서 골목 위쪽으로 다산초당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있어서 올라갔더니 초가집이 나왔다.


이 초가집이 다산초당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골목길 끝까지 왔는데 이 집이 아니면 어디지? 난감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관광 안내판이 보였다. 사적 제107호 정다산 유적이라고 쓰여 있었다. 글을 읽어 보니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려있는 정석, 약천, 다조, 연기석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 실학이 구상되던 도량이요 산실이다.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고 쓰여 있다.


표지판의 안내에 따라 오솔길로 올라갔다. 시인 정호승이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고 안내 표지판에 쓰여 있던 글이 실감났다. 나무뿌리가 길에 깔려 있었다.


비가 온 후라 숲속은 축축하게 습기가 찼고, 날씨도 후덥지근하게 더워서 땀이 많이 났는데 모기떼까지 기승을 부려서 여러 군데 물렸다. 그래도 올라가는 길이 멋있었다. 중간쯤 올라가니 시인 정호승의 시 '뿌리의 길'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시를 읽어 봤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조금 더 올라가니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가니 다산초당이 눈 앞에 나타났다. 숲길을 올라와 산중턱에 자리잡은 다산초당은 은둔자의 집이었다. 정자를 지을만한 곳처럼 보이지도 않은 곳에 다산초당이 있었다.


초당 앞 좁은 마당에 평평한 돌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 다조라고 쓰여 있다. 아까 안내판에서 본 다산 4경 중 하나였다. 안내판에는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다산초당의 제3경이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차 달이는 부뚜막이다.


초당 방안을 들여다 보니 아까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봤던 다산 영정 사진과 같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한 장 찰깍!


다산초당 오른편에는 연못이 있다. 그 곳에 가 보니 다산 비경 4번째인 연지석가산이라 쓰여 있다.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가짜 산이라는 뜻이다. 원래부터 여기 연못이 있었는데 다산이 더 넓힌 후에 바닷가의 돌을 주워 연못 가운데 산을 쌓았다고 한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에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고 적혀 있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도 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축구에서 독일과 치뤄진 모든 게임의 승리팀을 맞추고 우승팀도 맞췄던 '문어 파울'처럼 신기한 잉어였나 보다. 이제는 잉어는 없고 물만 차 있었다.


다사초당 뒷편으로 가 보니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이 약천이란다.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히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했단다. 약수터처럼 근처에 바가지도 놓여 있었다. '묵은 병은 고사하고 일단 목이나 축이자'고 생각하고, 물을 좀 떠 마시려고 약천을 들여다 보니 지렁이처럼 생긴 곤충이 기어다녔다. 헉~ 뭐지? 도저히 이런 것을 보고는 물을 떠 먹을 수가 없었다. T-T


다산초당과 서암 사잇길로 올라가니, 바위에 "정석(丁石)"이라고 쓰여 있다. 정석은 다산이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손수 새긴 글로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안내판에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석(石)자가 군더더기처럼 느껴졌다.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을 모두 보고 나니, 다산초당 부속 건물 3개가 궁금했다. 서암은 출입금지로 줄을 쳐놓아서, 연못을 지나서 동암 쪽으로 가보았다. 서암은 제자들이 머물던 곳이었고, 동암은 다산이 초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을 집필한 사랑채였다고 한다.


동암에는 추사 김정희가 다산을 위해 직접 썼다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고 또 봐도 명필이로다~


동암을 지나서 더 가니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 길이 나왔다.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말이라고 한다. 이 정자는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것이란다. 다산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내려다 봤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강진군에서 최근에 세웠다고 한다. 정자에 서서 내려다 보니 강진만이 잘 보였다. 한동안 정자에 앉아서 땀을 식혔다. 그리고 Foursquare로 다산초당을 체크인을 하려 검색하니, 다산초당이 나오지 않아서 새로 등록하고 체크인했다.


백련사로 가보려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귤동마을에서 보았던 식당에서 아침겸 점심 식사를 할 작정으로 마을로 내려갔다. 식당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보니, 사람들은 많은데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고 장사를 하는지 마는지 사람이 와도 신경을 안 썼다. 아마 모두 손님이고 주인은 다른 곳에 간 모양이다. 땀에 흠뻑젖은 상태에서 다산유물전시관으로 언덕을 넘어갔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 안에 들어가 에어컨을 트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배가 고팠지만 일단 해남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로 향했다.

▶해남 대흥사

대흥사 입구로 들어올 때 두륜산 케이블카 타는 곳이 보였다. 이곳을 지나 대흥사 입구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이 즐비하게 있는 곳에서 보쌈정식이라고 크게 써진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인 아주머니 왈 "보쌈정식 1인분은 주문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식당으로 갔다. 주인 왈 "1인분 팔면 손해다"고 말했는데, 배가 고파서 보쌈정식 좀 먹겠다는데, 1인분이 손해라면 더 비싸게 팔면 되고, 손님이 그 돈을 내고 먹을지 말지 결정하면 그만인데 1인분을 왜 못 팔지? 근처의 "기송정 식당"이라는 데로 가서 "돌솥 죽순 회비빔밥"이라는 처음 들어 보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맛있었다. 여기서도 Foursquare 체크인 한 번 더~


두륜산 대흥사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차를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로수길은 화엄사처럼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주차를 하고 주변의 안내 표지판을 읽어 봤다. 두륜산은 남해 가장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산으로 해발 703m로 절경을 자랑한단다. 이곳은 만년불패지지(萬年不敗之地)로 전해오는만큼 역사상 피해가 거의 없는 지역이란다. 걸어서 올라가는 길은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날씨도 맑고 공기도 신선했다.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다 보니 한옥집이 나왔다. 입구 현판에 유성관이라고 쓰여 있다. 이 집이 말로만 듣던 대흥사 입구 유성관이로군. 그런데 여기도 대흥사 입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가로수길을 따라서 한참을 들어온 상태라 대흥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 곳에 여관이 있었다. 국내에서 사찰 내에 있는 유일한 여관이란다. 유성관은 1박밖에 할 수 없다고 한다. 방도 10여 개 보였다. 시원한 개울가에 있었다. 그리고 바깥 오두막같은 곳에서 식사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다음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하룻밤을 묵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흥사 일주문을 지나서 사리탑 군집을 지나고(여기에 서산대사의 사리탑도 있다고 쓰여 있었으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돌다리도 건너고, 계곡물에 들어가 발도 담궈봤다. 천년고찰답게 입구 길은 고목들로 울창한 숲길이었다. 두륜산 해탈문을 지나니 대흥사 경내가 두륜산 품안에 펼쳐졌다. 해탈문에서 바라본 두륜산은 마치 부처님이 누워 계시는 것 같다고 한다. 오른쪽 끝의 봉우리가 부처님 얼굴, 가운데 봉우리가 부처님 가슴, 왼쪽 끝 봉우리가 부처님 발이라고 한다. 해탈문에서 왼쪽의 부처님 발쪽에 대웅전이 있고, 가운데 가슴쪽에 천불전이 있고, 오른쪽 부처님 얼굴 쪽에 표충사가 있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목에 연리근이 있었다. 연리근은 가까이 자라는 두개의 나무 뿌리가 합쳐진 것을 말한다. 여기에 벌집같이 생긴 것들이 소원을 비는 초와 등이었다. 효험이 있단다.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 돌다리를 건너고 사천왕문을 지났다.


대웅전 오른쪽에 윤장대라는 기이한 것이 있었다. 윤장대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일종의 장경각이라고 한다. 일반인도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지 않아도 공덕을 쌓을 수 있으며, 윤장대에 자신의 희망과 소원을 담은 발원문을 넣고 돌리면 발원이 성취되는 성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한 번 돌려 봤더니 생각보다 힘 안 들이고 잘 돌아갔다.


대웅전을 나와 중앙의 천불전으로 갔다. 불상이 천 개가 모셔진 불전이다. 천불전에서 바라 본 두륜산을 사진으로 찍어봤다.


천불전 앞 연못에 연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중앙 연못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표충사가 있다. 표충사 가는 중간에 성보박물관을 열심히 짓고 있었다. 여기를 지나니 초의 대선사 상이 나왔다. 초의선사의 발자취를 설명한 비석을 보니, 초의선사는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중흥시켰고,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였다고 쓰여 있다. 그는 불교와 실학 사상이 만나 꽃 피울 수 있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선과 차의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스님의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맛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스님은 시와 글씨와 그림에도 탁월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오른쪽으로 올라가니 표충사가 나왔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 격퇴에 앞장 선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한 사당이라고 한다. 사당이라면 유교 형식의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대흥사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이 좀 독특했다. 청허당 서산대사를 중앙 벽에 배치하고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뇌묵당 처영대사를 마주보게 배치했다.


대흥사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날씨가 너무 더워서 계곡에 들어가서 목욕을 했다.


▶해남 녹우당

학교에서 배운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인 녹우당은 대흥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마침 내가 찾아간 월요일은 이곳을 오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관광지로 새단장을 하는지 새 건물(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과 새 안내석들이 보였다.


새로 지어진 고산윤선도유물관과 관리동, 교육동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니 녹우당이 보였다. 녹우당 대문 바로 앞에는 높이 30여m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500년 가량 묵었다고 한다. 녹우당 입구로 가는 길의 아래쪽 왼편에 아부사시사 시비가 있다.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시가 이제는 뭔 얘긴지 잘 모르겠다.


은행나무가 있는 녹우당 입구에 가보니, 입구는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읽어 보니,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라고 한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어초은 효정이 해남읍 연동리에 살터를 정하여 지은 집이다. 그러니까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조 작가인 고산 윤선도와 그의 증손이며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이 집안에서 난 사람이라고 한다. 윤선도는 중년에 해남읍 연동리에 내려와 살면서 해남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를 내왕하면서 불후의 시조문학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에는 가묘인 어초은사당과 고산사당이 있고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오백여년된 비자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갈 수 없어서 오른쪽으로 어초은사당과 고산사당과 비자나무 숲으로 가는 골목길로 올라갔다. 양편에 담장이 있어서 운치가 있는 골목길이었다.


골목길을 지나자 어초은 사당과 고산 사당이 나왔다. 여기도 들어갈 수 없었는데 밖에서 보니 건물이 많이 낡아 보였다.


사당을 지나자 해남윤시 중시조인 효정 어초은이 심은 비자나무 숲과 어초은의 묘가 나왔다. 이 비자나무 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녹우당 뒷길을 따라서 왼편으로 가니 추원당이라는 건물이 나왔다. 이 건물도 좀 낡아 보였다. 녹우당을 6시 방향에서 출발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고 입구로 다시 돌아 왔다. 입구 왼쪽 담장에 담쟁이 넝쿨이 멋있게 자라고 있었다.


지금 녹우당(綠雨堂)에는 윤선도의 14대손인 윤형식씨가 살고 있다고 한다.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인 녹우당에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데 놀랐지만, 늘 구경할 수 있도록 열어 놓지 않아서 나같은 구경꾼이 집안을 기웃거리가 민망스러운 것이 흠이었다. 녹우당 오른편에 있는 구 유물전시관도 닫혀 있어서 윤선도의 작품을 비롯하여 윤두서의 자화상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 아래에 있는 연지를 구경했다. 마을 어귀쯤 되는 곳에 있는 이 연못은 네모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 섬이 있다. 연못 주위에는 해송이 심어져 있고 가운데 섬에도 하나가 심어져 있다. 연못에는 연꽃들이 피어 있었다. 대나무 다리를 건너서 가운데 섬에 가 보았다.


녹우당 구경을 마치니 오후 5시가 되었다. 다른 곳을 더 구경하고 또 하루를 묵을지 아니면 집으로 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와이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빨리 올라오라는 성화에 남도 여행을 마치고 수원으로 향했다.

- 강가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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