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를 읽었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는 과거로 되돌아간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오늘 KTX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 오는 길에 기차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한반도 주민 공동체의 미래로의 길은 막혀 있다. 우리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와 있고,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북한 기득권층 못지않게 남한의 기득권층도 시대착오적인 토건 국가, 수출 국가, 안보 국가 모델을 완고하게 지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한 경쟁주의'의 지옥에서 '왼쪽'으로의 행진만이 우리의 미래다."고 주장한다. 정말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보면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자각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 1부 가시밭길, 하지만 갈 수밖에 없는 길
- 강가딘
▶ 1부 가시밭길, 하지만 갈 수밖에 없는 길
1부에서는 한국에 진보정당이 꼭 필요한 까닭을 말하고 있다. "전 세계가 새로운 대공황과 (언제 일어날지 모를) 주요 열강 사이의 무력 충돌로 이어질 확률이 큰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동아시아도 국익주의와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충돌 무대가 될 확률이 적지 않다. 그러한 면에서는 민족주의적 광기를 어느 정도 식혀줄 수 있는 비민족주의적 사회 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여간 한국에서 대중적 진보 정당을 한다는 것은 가시밭길이지만 꼭 가야 할 가시밭길이다. 성패 여부와 무관하게, '의미 있는 소수'로 존재해도 좋다. 그 소수로부터의 압력마저 없다면 대한민국은 오늘날보다 더 야만적인 '중간급 소제국'이 될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적 정체성이 아닌, 계급적 정체성에 따른 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좌파가 다시 '국가 탈환'에 성공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나도 직장인이지만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에 믿음이 아직 가지 않고, 계급적 정체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니면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계속해서 이어지는 박노자의 혁명론을 들어 보자. 그는 국내의 맹아적 사회주의적·사민주의적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혁명보다는 책임질 수 있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약속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혁명보다는 복지국가로의 급진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급진적 개혁'이란 피를 흘려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챙취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하며, 일부 대형 기업들(일차적으로 금융 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한다. 이를 통해 추진할 급진적 개혁의 내용이란 다음과 같다.
- '토건 국가 예산'을 '교육·복지 예산'으로 바꾸어 무상 교육·무상 의료의 실천을 통해 경기 부양을 도모하는 것
- 부동산 보유세 등 부유층을 집중 겨냥하는 각종 부유세를 징수하고, 부동산 투기 적발 시에 투기로 벌어들인 재산을 모두 몰수하는 것
- 대학 평준화와 '명문대' 개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최대한의 국가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
- 대기업 이사회에 노조 대표가 꼭 참여하여 노동자들이 경영에 활발히 참여할 수 있게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것
- 남북한 간의 공통 군축으로 국방 예산을 줄이고 교육·복지 예산을 늘리는 것
▶ 2부 공포공화국을 작동시키는 톱니바퀴들
2부에서는 자본의 폭력과 국가의 폭력, 그리고 종교로 장사는 자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는 왜 자본주의를 혐오하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 착취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의 모순점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대판 천민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정규직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고 한다. 체제가 강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정규직에게도 없다. 우리에게 노역을 주고 돈 쓰는 기쁨을 안겨주는 재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 글을 읽어 보면 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든다. "가정에서는 '말 잘 듣는 것'이 '착하다'는 것을 익히고, 학교에서는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꼭 외워야 할 정답이 하나씩만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군대에서는 '튀는 행동'이 신체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익힌 이들은, 자본이 가용하는 노역의 시간이 끝나고도 곧바로 자본이 제공하는 달콤한 중독에 빠져든다." 그래서 우리의 노예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며, 자본이 제공하는 바보상자는 멀리해야 한다. 암. 그래서 나는 TV를 보지 않는다.ㅎㅎ 그리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우리가 '밑'의 고통에 관심을 끄고 '나만의 인생'을 즐기는 길을 택할 경우,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가하는 폭력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를 칠 것이다. 아주 아프게."
그리고 그는 촉구한다. '살인 훈련을 받으라는 국가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인정하여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것을. 또한 아직도 '사랑의 매'로 여기는 상당수 교사와 학부모에게 아동에 대한 일체의 심신상의 폭력 행위를 금지하라고. 탈북자, 이주 노동자 등 대상자 신분의 '불법성'과 '합법성'을 불문하고 자신의 가족과 같이 살 인간의 본래적 권리를 주라고. "2009년 현재, 남한의 통치 방식은 여전히 '철권통치'의 요소를 포괄적으로 내포한다. 인권이 구조적으로 부정되는 상황을 우리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 일체 양심수 석방, 남북한 간 자유 왕래 및 이주 노동자들의 정주권 쟁취, 아동에 대한 일체 폭력 금지,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위한 투쟁에 미력이라도 보태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도 반인권적 지배자들의 공범이 되는 셈이다."고 주장한다. 나도 이런 대목에서 무엇보다 비폭력과 인권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에 깊이 매료가 되었다.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었는데 이것도 반성도 했다. 또한 그의 비민족주의적 사상에 공감이 간다. 그의 주장을 한 번 들어 보자. "민족주의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존재해 온 다양한 종국, 국가들을 뭉뚱그려 '똑같은 우리 한민족'으로 묘사하여 '한민족'의 '기백'과 '힘'을 찬양하는 담론인데,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현실적으로 힘을 잃어가는 개개인들에게는 바로 '우리 힘'에 대한 숭배야말로 최적의 위로(慰勞), 최강의 정신적 마취제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장사', '부처님 장사'하는 이들에게 또 한 마디 했다. 배제와 차별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병역 거부를 더 이상 '신자의 당연한 의무'로 여기지 않고 국가적 폭력에 부역하는 죄악을. 교회가 장기적 보수화의 일등공신이 되는 현실을. 그는 "빈곤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개인 문제'로 환원하고 권리 투쟁 대신 신앙적인 '개인적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교회가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면 과연 '모두를 위한 해결'을 모색하는 좌파적 담론이 쉽게 확산될 수 있겠는가?"고 묻는다. '민족 중흥'과 보조를 맞춘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고, '기독교인들의 총화안보와 반공궐기'를 이끌고 '해방신학, 혁명신학, 흑인신학'을 '악마적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봤던 유신독재 시절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꾸짓었다. 또한 종교인들이 왜 낙태에 반대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개인의 출산 여부가 '국익'에 의해 결정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라크 침략에 반대하지 않는 종교계의 비논리적인 형태를 꾸짓는다. 해박한 역사 지식과 유창한 글솜씨 못지 않게, 촌철살인의 꾸짓음이다.
▶ 3부 정신의 거세에 맞서는 냉철한 시선
3부에서 그는 '탈민족'은 여성·아동·장애인·동성연애자·이주민 등 모든 비주류, 약자들에 대한 친화적이고 해방적인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와 민족 뒤에 숨은 야만성을 얘기한다. "세상에 존경스러운 국가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고 계급적 착취 관계를 위한 제도적 틀을 제공해주는 국가라는 "무장한 군인과 경찰의 존재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단체"는 필요악일는지는 몰라도 '존경'의 대상은 못 된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주장한다. '존경스러운 국가'란 형용모순에 불과하며 세뇌·훈육·처벌·감시의 왕국일 뿐이라고. 긍지를 가르치겠다는 뉴라이트의 역사관도 비판한다. "과거의 추함을 애써 보지 않으려는 자가 현재나 미래의 온갖 추한 짓을 다 저지르게 돼 있다는 역사적 진실을" 깨달으라고.
외국 저널의 숭배나 지식 권력의 신비화도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어느 분야보다도 우상을 파괴해야 할 과학계에서 왜 '선진국' 저널이라는 큰 우상이 생겼는가 묻는다. 황우석 사태와 같은 것은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던 <사이언스>지의 권위 때문이지 않았는가고 묻는다. 특히 객관적인 입증이 불가능에 가까운 인문과학에서는 더 큰 폐단이 있다고 지적한다. 대학 시간 강사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국내 대학, 이른바 착취 공장들의 경우에는, 그 봉건적인 사적 예속과 거의 조폭 수준의 '막가파'식 대우, 그리고 신자유주의식 순치 및 착취 원리의 독특한 결합은 정상적인 연구 생활을 사실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니 문제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주장한다. 대듦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스승이든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권위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사람은 충분한 의미의 '어른'이 되기 어렵다"고 하면서, "부모와 교사, 그리고 군 장교의 말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수인들을 대량 학살한 뒤 커피를 마시면서 모차르트 음악을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인간형이 될 수도 있다. 절대 순응이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한국의 대학의 자아상도 지적한다. '삼성관'과 '포스코관', '이학수 강의실'과 '이명박 라운지'가 있는 요즘 대학의 모습과 이를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서울 소재 '명문 대학'의 특권 의식을 지적하면서 "'모든 권력이 권력자를 부패시키지만 절대적 권력은 권력자를 절대적으로 부패시킨다'는 말만큼이나 '모든 특권들이 양심과 양식을 마비시킨다'는 말도 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대듦이 정신'이 증발되면 남는 것은 지성의 무덤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적인 세계적 위계질서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신앙'에 빠져 인간다운 모습을 다 잃은 나약한 인간들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국토'라는 근대의 유사 신앙을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20세기의 살기(殺氣)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민족주의라는 정신적 독은 양심을 마취, 아니 '마취'라기보다는 아예 '말살'시켜 버린다고 한다. 우리는 제국주의와 전쟁의 야만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현주소는 '탈근대'가 아니라 '패권 시대'에 가까우며, 이런 야만 세력에 맞설 수 있는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우리 편'의 세력화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우리가 이런 현실을 저항없이 받아들인다면 나중에 탓할 데라고는 우리 자신밖에 없다. 한 국민은 그 국민의 자질에 맞는 사회 체제와 정부를 갖게 돼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적 상황을 인식하여야 한국의 체제 안에서 '저항적 동원'이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
- 강가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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